지난 연말 한국은행은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이라는 두 가지 정책목표에 대한 대응방향을 담은 2015년 통화신용정책 운영방향을 발표하였다. 물가안정에 대해서는 경제여건 변화를 반영한 적정 인플레 수준에 맞추어 중기적인 물가안정기조가 유지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으며, 금융안정과 관련해서는 주요국의 통화정책 변화와 가계대출의 증가세 등을 언급하였다.
특히 금융안정 중에서 미국의 통화정책 기조변화에 따른 자본유출입의 변동성 확대 가능성에 대해서는 그 위험이 제한적인 것으로 평가한 반면, 가계부채 문제에 대해서는 보다 조심스런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한은은 가계부채 관련 DB 구축을 통한 모니터링 강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12월 금통위 직후 한은 총재도 가계부채 증가세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요컨대 가계부채 문제가 우리 경제의 금융안정을 저해할 수 있는 핵심적인 위험요인으로 부상하고 있는 셈인데, 이러한 사정은 한은 외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즉 저성장-저물가 기조에 대응하기 위한 확장적 통화정책의 필요성을 인정하더라도, 가계부채 문제 때문에 추가적인 금리인하는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사례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이라는 통화정책의 두 가지 과제를 둘러싼 논란은 오래 전부터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어 왔다. 원론적으로는 금리라는 단일한 정책도구를 가지고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있었으며, 1990년을 전후한 일본의 경험도 자산시장 거품에 대해 통화정책이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사례에 속한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 미국 주식시장의 “비합리적 과열”을 둘러싼 논란도 마찬가지다. 보다 최근의 사례로는 2008년의 금융위기 이후 경기 부양을 명분으로 한 양적완화 정책이 주식시장 거품을 야기했을 뿐이라는 비판 등이 있다.
전통적으로 금융안정 문제에 대한 중앙은행들의 표준적인 입장은 물가안정을 추구하는 중앙은행이 자산가격 거품에 별도로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즉 자산가격 거품이 실물부문의 수요 증가를 통해 물가불안을 야기할 경우 긴축적 통화정책으로 대응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거품은 정의상 언젠가는 꺼질 것이므로 별도로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거품을 정확히 측정하기도 어렵고,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금리정책이 특정 자산시장의 움직임에 대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와 결합되면서 자산 거품을 사실상 방관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중앙은행들의 이러한 태도가 매우 심각한 문제를 낳았음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 위기 이전의 이른바 “대완화”(great moderation) 시기에 미 연준은 물가안정을 이유로 주택가격의 급등을 방치하였고, 이는 주택 거품의 형성과 붕괴를 통해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위기로 귀결되었다. 물론 위기의 원인을 두고 연준의 저금리정책이 아니라 신흥국의 과잉저축(“global saving glut”)이 근본적인 배경이라는 주장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금융감독 및 규제의 완화가 핵심적인 문제였다는 진단도 있지만, 어쨌든 정책당국이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수행하는 데 실패한 것은 분명하다.
지난 금융위기를 계기로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기는 했지만, 통화정책과 금융안정이라는 문제는 오래 전부터 관련 연구자들의 주요한 연구주제 중의 하나였다. 특히 국제결제은행(BIS)의 주요 연구진들은 “대완화” 시기부터 실물경제의 순환과 구별되는 금융사이클 개념을 통하여 실물경제(물가)의 안정과 금융안정이라는 두 가지 과제의 관련성을 연구하여 왔다. 이들은 실물경제의 변동이 금융부문의 역할에 의해 더욱 확대되거나 심화되는 현상에 주목함으로써, 단순히 실물경제에 대한 금융부문의 영향을 다루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각각 독자적인 내부적 동인과 순환주기를 갖는 실물사이클과 금융사이클을 구별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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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두 가지 사이클이 언제나 동조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실물사이클의 하강기에 금융사이클은 상승기일 수 있으며, 그 반대도 가능하다. 따라서 실물경제, 즉 물가안정을 목표로 하는 통화정책과 금융안정을 목표로 하는 거시건전성 정책은 괴리될 수 있고, 각각의 국면에 따라 이들 정책들을 적절하게 조합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그러나 이들의 금융사이클 개념은 아직 추상적이다. 금융사이클을 진단하기 위한 지표들, 즉 총신용 규모와 GDP 대비 신용(대출) 비율, 그리고 주식시장과 주택시장의 움직임 등은 실물사이클과 독립적으로 설명되기 힘들다는 점에서 명료하지 못한 부분이 많으며, 그 정책적 함의도 실물사이클과 무관한 긴축 옹호론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금융사이클 개념과 금융안정 문제가 우리 경제의 현안인 가계부채 문제에 어떤 시사점이 있을까? 표면적인 물가안정을 넘어서는 폭넓은 시야에서 금융안정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의미가 있지만, 최근 우리 경제의 가계부채 증가를 이러한 의미에서의 금융불안 가능성이 높아지는 징후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본래 통화정책이 개별 금융기관의 건전성 관리라는 미시적 차원을 넘어 거시건전성 차원에서 신용(부채)의 증가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자산시장의 거품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고, 이러한 거품의 붕괴가 금융부실과 실물경기 침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 경제의 가계부채 증가는 그 성격이 다르다. 즉 가계부채 증가가 주택가격 상승을 야기하고 있지 않으며, 주식시장을 비롯한 다른 자산시장의 과열 징후도 없다. 최근 가계대출의 증가세를 주도하는 것이 자영업자와 서민층의 생계형 대출, 그리고 전세자금 대출이라는 점은 이것이 자산 거품의 형성과 붕괴 가능성을 의미하는 고전적인 금융불안과는 전혀 다른 문제임을 보여준다.
전세자금 대출의 배후에 있는 전세가격의 상승은 매매가격의 상승기대가 약화됨에 따른 주택시장의 구조적인 변화를 반영하고 있을 뿐이며 주택시장의 거품과 무관하다. 또한 생계형 가계대출 증가는 내수부진과 고용 불안, 높은 자영업 비중 등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이로 인해 일부 자영업의 공급과잉이 지속되고 있을 수는 있지만 이는 해당 부문의 구조조정과 신규일자리 창출 등을 통해 해결될 문제이다.
모든 부채는 과도하게 증가할 경우 부실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에서 위험하지만, 호황기의 부채 증가와 불황기의 부채 증가가 동일한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호황기에 낙관적 기대와 더불어 증가한 부채는 불황기로 접어든 이후 거품이 붕괴하고 잠재위험이 현실화되면서 금융불안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경제의 상황처럼 불황기에 구조적인 요인으로 인해 증가하고 있는 부채는 자산시장의 거품과 무관하다. 불황기의 부채 증가는 불황에 따른 경제주체들의 재무구조 악화를 반영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불황의 심화를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되는 측면도 있다.
가계부채의 건전성 관리를 위해 적절한 미시적 기준들은 반드시 필요하며, LTV와 DTI 등의 규제기준들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불황기에 증가하고 있는 가계부채의 부실화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긴축정책이 아니라 경기회복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통화정책은 금융안정을 위해서도 경기회복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완화적 기조를 취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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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최종편집일:2024-05-03 09: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