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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채는 보통 방행시장에서 매입되어 만기까지 보유되는 비중이 높기 때문에 투자자 입장에서는 발행 시 신용등급이 만기까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회사채 만기 이전에 신용등급이 크게 하락하여 투자자가 위험관리 차원이나 내부 투자기준 제한으로 회사채를 매도해야 할 경우 큰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용평가가의 회사채 신용등급이 안정적으로 움직일 것이라는 시장의 신뢰가 훼손되게 되면 시장 경색을 초래하기 쉽다.
점차 상위 신용등급으로 전이되고 있는 회사채시장 경색현상도 시장의 신용등급 안정성에 대한 의문과 불확실성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2012~2013년에 웅진, STX, LIG건설 등 A등급 기업들에서 신용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다수 기관들은 실질적 투자하한선을 BBB0~BBB-등급에서 A-등급으로 상향조정했다.
나아가 조선, 해운 기업들을 중심으로 대폭적인 신용등급 하향조정이 이루어지고 기업 구조조정 이슈가 대두되자 기관투자자들은 투자기한(3년) 내 BBB+등급까지 하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A+~A0등급, 심지어 AA-등급 회사채까지도 투자를 기피하게 되었다.
불과 2년 전만하더라도 신용평가 3사로부터 '매우 우수한 신용상태로 채무불이행 위험이 매우 낮은' 것으로 간주되는AA-등급을 받고 있더 대우조선해양에서 신용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을 보면 이와 같은 기관투자자의 보수화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회사채 신용등급의 안정성 문제 : 실증비교
하지만 과연 시장의 우려만큼 우리나라 회사채 신용등급이 불안정한 것인지 아니면 시장의 우려가 과장된 것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실증적으로 회사채 신용등급이 변화한 자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SEC), 유럽(ESMA) 등의 감독당국은 신용등급 안정성을 신용평가사 규율의 중요한 평가요소로 간주하여 신용평가사별로 신용등급 변화를 표(등급전이확률행렬 ; rating transition probability matrix)로 공시하고 있다.
이러한 등급전이확율행렬에는 특정기산 동안 특정 신용평가사의 신용등급이 변화한 양상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예를 들어 2012년 초에 S&P로부터 A-등급을 받았던 회사채들이 2015년 말에 어떤 등급을 받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등급 신뢰도가 가장 높은 편으로 평가받는 한국기업평가(이하 한기평)와 한기평 모회사인 Fitch의 최근 회사채 신용등급변화를 비교해보면 우리나라 회사채의 신용등급 안정성이 상대적으로 뒤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2015년 초 A등급을 받았던 회사채가 2015년 말에도 A등급을 유지하는 비율이 Fitch는 92.8%에 이른 반면, 한기평은 78.6%에 머물렀다.
2015년 중 한기평 또는 Fitch의 해당 회사채 평가가 종료된 경우 이를 소멸로 처리되었는데, 우리나라 회사채시장의 경우 소멸 비율이 높은 편이다. 이를 감안하여 소멸사례를 제외한 후 계산하더라도 Fitch 96.3%, 한기평 90.0%로 그 차이가 적지 않았다. 또한 여기에 우리나라와 글로벌 신용등급 간 스케일 차이를 추가적으로 감안하여 Fitch A등급 유지율(96.3%)과 한기평의 AA등급 유지율(93.6%)을 비교하더라도 우리나라의 등급 안정성이 낮게 나타났다.
등급소멸을 제외한 A등급 유지율 96.3%와 90.0%간 6.3%p 차이는 일견 크지 않은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만기 보유가 대부분인 회사채시장의 특성상 투자자 입장에서 의미 있는 등급변화 위험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1년이 아닌 3년 내 등급변화율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미국․유럽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1년간의 등급변화 결과만을 공시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2015년 등급전이 양태가 3년간 지속된다고 가정하고 3년 중 가상의 신용등급변율을 산출해 보았다. 그 결과 연초 A등급이 3년 후에도 A등급으로 유지되는 확률은 Fitch 90.29%, 한기평 73.68%로 매우 큰 차이를 보였다. 즉, 투자자들이 우리나라 회사채 신용등급의 안정성에 대해 느끼는 불안은 실증적인 근거가 있고, 이러한 문제가 A등급 회사채시장 위축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판단된다.
신용등급 불안정성의 원인
우리나라 회사채 신용등급의 안정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원인을 신용평가 품질의 문제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신용등급 안정성 문제는 기업회계 투명성 문제, 불투명한 기업 지배구조, 수주산업 및 수출기업의 높은 비중, 글로벌 경기변동에 취약한 경제구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부실화되는 기업들은 편법․불법적인 회계장부 조작이라는 유혹에 빠지기 쉬운데, 사후적으로 드러나는 손실과 분식회계는 신용등급의 안정성을 훼손한다. 신용평가사는 외감 재무제표를 바탕으로 신용위험을 평가하기 때문에 사후적으로 중요한 회계 정보가 밝혀지게 되면 해당 기업․회사채의 신용등급이 급격히 하락할 수 있다.
실제로 STX그룹, 동양그룹, 웅진홀딩스, LIG건설 등 A등급에서 급작스럽게 신용사건이 발생한 기업들에서는 분식회계 논란과 소송이 끊이질 않았으며, 최근 대우조선해양도 뒤늦게 밝혀진 2조원의 손실로 구조조정 논란이 촉발되었다.
둘째, 우리나라 대기업의 복잡다단한 계열사 구조와 암묵적․잠재적 계열사 지원 이슈는 개별 기업의 신용위험 평가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LIG건설 사태에서 보듯이 우량 계열사의 암묵적인 지원이 기대되던 상황에서 계열사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 시장이 예기치 못한 신용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셋째, 수주산업 기업에 대하여 신용등급 안정성을 유지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최근 몇 년간 등급 이슈가 되고 있는 기업들 중 다수가 조선․건설․중공업 등 이른바 ‘수주’산업 기업인데, 수주산업 기업들은 자금조달 수요가 많아 대규모로 회사채를 발해하여 왔다. 수주산업은 수주 이후 공기 중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지만 대금 수취는 납품 시 완료되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수주산업 기업에서는 손실이 적시에 적절히 장부에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신용등급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가 어렵다. 또한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수출의존도가 높은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기업들도 통신․유통․필수소비재 등 소위 경기방어형 기업에 비해 경기 변동에 취약하다.
물론 이와 같은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신용등급 안정성을 훼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국내 신용 평가사들도 신용등급 안정성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국내 신용평가사들은 글로벌 평가사와 마찬가지로 경기사이클에 관계없이 신용등급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신용등급 평가를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신용평가사가 대우조선해야 장부에서 은폐된 손실을 미리 감안하기는 매우 어려웠을지라도 신용평가사들이 글로벌 조선산업의 업황․전망과 해당 기업의 펀더멘털을 감안하여 2012~2014년 신용등급을 좀 더 보수적으로 부여하는 것이 옳았다는 비판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인정된다.
다만 2014~2015년 금감원의 신용평가사에 대한 대대적인 검사․제재 이후 신용평가사의 신용평가 적정성이 개선되어 등급 인플레이션 문제가 감소하고, 특히 등급 하향조정이 보다 적시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시장의 평가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회사채 신용등급들이 급격히 하락하는 현상이 보다 두드러지는 것도 국내 신용평가사의 신용평가가 보다 엄격․정확해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조정 과정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신용등급 불안정성에 대한 대응 방안
회사채 신용등급의 불안정성이 복합적이고 구조적인 요인에 의해 야기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정책당국은 회사채 신용등급 안정성을 인위적으로 제고하는 방안을 모색하기보다는 회사채 신용위험에 대한 시장의 불확실성을 해소하여 시장의 불필요한 위축을 방지하는 접근방법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신용평가사의 회사채 신용등급변화를 1년이 아닌 3년 동안 추적하여 그 결과를 공시해야 한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기관투자자가 회사채를 보유하는 기간 중 해당 회사채의 신용등급이 변화하는 위험을 적절히 예상․평가할 수 있도록 5년과 10년간의 등급전이확률행렬을 공시하고 있다.
회사채의 신용등급변화 위험 자체를 감소시킬 수는 없지만 투자자들이 신용등급변화 위험을 보다 정확히 평가할 수 있게 되면 필요 이상의 시장 혼란과 경색도 감소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이는 기관투자자와 증권, 즉 시장의 신용평가사 규율을 강화하여 신용평가사들이 장기적인 신용등급 안정성을 제고하도록 유인하는 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
둘째, 계열사나 국가의 암묵적인 지원으로 신용등급이 상향 조정되는 회사채에 대해 이러한 암묵적 지원을 배제하여 평가된 기업 독자신용등급 정보를 시장에 유통시킬 필요가 있다. 국내외 신용평가사들의 신용평가방법론에 따르면 기업 자체의 신용도를 감안하여 독자신용등급을 책정한 후 여기에 외부의 암묵적인 지원을 추가적으로 고려하여 최종 신용등급을 산출하고 있다.
따라서 독자신용등급 정보는 이미 신용평가과정에서 생성되고 있고, 법규상 독자신용등급 기재를 제한하는 규정도 없지만 당국의 지도로 인해 신용평가보고서에 독자신용등급을 기재하는 것이 제한되고 있다. 만약 독자신용등급 정보가 시장에 전달될 경우 기업 신용을 분석하는 시장참여자 입장에서 신용평가사의 논리와 근거를 보다 명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되어 불확실성이 감소하고 신용평가사에 대한 시장규율 강화에도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예전부터 일각에서는 독자신용등급 공개가 시장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해왔다. 하지만 신용평가보고서에서 독자신용등급을 A, BBB 등 별도 등급으로 직적 표기하지 않고 ‘독자신용등급에서 2 세부등급을 상향조정할 결과 A+등급으로 이 기업의 신용등급을 평가’한다는 식으로 최종 신용등급과 독자신용등급 간 세부등급 차이만을 서술한다면 독자신용등급과 최종 신용등급이 혼란을 초래하는 부작용은 최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신용평가 품질 제고를 통한 신용등급 안정성 제고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관투자자를 중심으로 한 시장참여자의 신용평가사 규율이 강화되어야 한다. 신용평가산업은 평가정보를 투자자 등 시장에 제공하지만 수수료는 발행기업으로부터 수취하기 때문에 등급쇼핑 및 등급 인플레이션 유인구조가 상존할 수밖에 없다.
발행기업의 압력으로부터 신용평가사가 독립성과 균형을 갖추기 위해서는 기관투자자들이 신용평가사들을 품질 차이에 따라 차별적으로 대우하는 관행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회사채 기관투자자 부분의 운용역략은 뛰어날지 모르지만 다른 한편으로 기관투자자들이 증권사(회사채 인수), 신용평가사, 채권평가사 등 시장참여자를 평판 및 서비스 품질과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대우하는 잘못된 관행을 답습하고 있다.
특히 신용평가사 시장 규율을 위해서는 기관투자자와 채권평가사들이 내부에서 기준으로 삼는 유효등급을 우수한 신용평가사 등급 위주로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민간의 관행을 법규로 강제하기도 어렵고 회사채 신용평가사가 3사만이 존재하는 가운데 투자자들이 평가사를 차별할 유인도 많지 않아 관행 개선을 유도할 방안이 마땅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국민연금, 우정사업본부 등 공공 기관투자자를 중심으로 내부 유효등급 체계 개선을 유도해 나가는 가운데 장기적으로 신용평가산업의 신규 진입이 이루어진다면 신용평가 품질 제고와 회사채시장 기반 성숙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금융연구원 |
기사최종편집일:2024-05-17 09:02: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