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의 수출규제로 촉발된 한일간 무역갈등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우리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WTO 제소 검토 등 국제 여론의 환기와 함께 미국에도 중재 요청을 한 바 있다. 하지만 미국은 복잡한 관계에 놓인 두 나라 문제에 선뜻 끼고 싶지 않은 눈치다. 이는 미국의 철저한 실리외교와 함께 미국이 주도한 국제협약 내용과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대한 발단은 강제 징용 소송에서 비롯됐다. 강제 징용 소송에 관한 한국 대법원 판결을 둘러싸고 일본은 한일청구권 협정에 근거한 중재위원회 설치를 요구했다. 이를 한국 정부가 거절하자 일본 정부가 이에 대한 사실상의 대항 조치로 수출규제를 단행한 것이다.
현재 일본의 배상문제에 대한 판단기준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 따르고 있다. 국제법상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끝난 것도 이 회의이며, 모든 지배와 자산에 대한 권한도 포기하게 된다.
연합국과 일본만의 강화조약 비준은 전후 보상문제의 해결이나 아시아 각국과 일본간의 국교 정상화 같은 문제를 덮어둠으로써 이후 외교적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교전국이 아니라 일본제국의 식민지라는 지위였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은 강화조약에 초대조차 받지 못했다. 심지어 소련,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자체를 거부했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당시 피해가 컸던 국가들은 강화조약과 별도로 보상협상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대부분의 나라는 전쟁피해에 대해 배상권을 포기하게 되었으나 국회비준이 부결된 인도네시아, 배상청구권을 포기하지 않은 필리핀과 남베트남, 그리고 조약에 초대받지 않은 중화인민공화국과 협상문제만 남게 되었다.
일본은 1955년부터 1959년에 걸쳐 미얀마, 인도네시아, 필리핀, 남베트남에 대해 보상을 했다. 일본이 정식으로 침략피해에 대해 배상한 것은 이 네 나라뿐이다.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경제원조를 하거나 무상 경제협력을 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배상쳥구권을 최종적으로 해결하며 경제원조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한일기본조약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대일강화조약)을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일본과 연합국 48개국이 맺은 이 평화조약의 제3장의 안전조항에는 미국과 일본은 안전보장조약을 체결했다. 미국은 당시 이 회의를 주도하면서 상식선을 넘는 관대한 정책을 일본에 베풀었다는 지적이 있다.
더 안타까운 것은 한국은 일본의 전승국에 대한 전쟁배상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참가하지 못함으로써 전시 손해 및 고통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향유할 수 없게 됐다. 일본이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도 바로 이 조약에 근거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명문규정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현재 일본의 아베정부는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을 통해 배상문제도 끝났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처럼 아베가 식민지시절 반인도적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아베정부의 수출규제 조치에 대응해 국내에서는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이를 지켜보는 시각들은 적절한 대응이라는 반응과 감정적 대응이라는 반응, 심지어는 바보 같은 행동이라는 반응까지 여러 갈래로 나뉘고 있다.
자발적인 국민들의 움직임에 대해 정치인뿐만 아니라 경제계 학계 등에서도 제각각의 목소리를 내며 비판에 열을 올리고 있는 가운데,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일부 극우세력들이 여전히 국권 침탈 시기와 비슷한 수준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1909년 안중근 의사 의거 당시에도 친일파들은 “시세의 대의(세계정세)를 모르고 한국의 무지한 건달(안중근)이 아시아의 위인(이토 히로부미)을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조선인들이 무지몽매해서 일본 여론이 얼마나 험악해지고 있는지 모른다”며 빨리 가서 사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여러 그룹에서 진사 사절단을 꾸렸다. 당시 일진회는 ‘광폭한 역도의 죄’라는 사절단을 꾸린 바 있다.
최근 아베정부의 수출규제 조치에 대해서도 국내 일부에서는 빨리 가서 사죄를 해서라도 정상화시켜야 한다고 부르짖고 있다. 극우보수신문도 일본의 스피커 역할을 자처하면서 여전히 여론을 호도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일본은 강자이고 우리는 약자이니 무조건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논리다.
이번 아베정부의 부당한 조치는 국가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며 국익이 걸린 문제다. 하지만 일부 극우세력들은 신문방송 매체 등을 통해 국익을 해치는 언사를 서슴지 않고 있다. 이러한 행태에 대한 비판과 지적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논리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아베의 기고만장한 횡포에 대해 일본제품 불매운동으로 맞섰다. 지난 주말에는 서울 광화문광장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아베를 규탄하는 촛불이 타올랐다. 국민들도 또 다시 정의를 외치며 길거리로 나선 것이다.
이같은 움직임은 토착 왜구들처럼 어떤 이익을 따져서 하는 행동이 아니기에 주저함이 없다. 오직 정의와 국민으로서의 당위성만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현재 한일관계를 보는 대부분의 시각은 누구에게 더 이익이 되고 순해가 되는지만 따지는 논리를 앞세우고 있다. 모든 것이 경제논리로 환원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실리만 따지다 보니 역사나 인권 등은 항상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경제적 손익만 따지다가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못하고 묻혀버렸던 경우를 여러 번 목도해 왔다.
그동안 한국 엘리트 사회에서는 ‘일본 민족을 따라 배우는 길이 우리가 살길’이라는 담론이 공유되었고, 이런 태도가 사회 일각에 뿌리 깊게 자리잡아 왔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이 경제사학계의 주류를 이뤄왔던 것이다.
하지만 국난이 닥칠 때마다 항상 민초들이 들고 일어나 나라를 지켰다. 민중은 개인보다 나라를 앞세웠고, 사리사욕보다 정의를 앞세웠기 때문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떨쳐 일어날 수 있었다.
반면, 엘리트 계층은 궤변론에 가까운 주장을 들이대면서 사리사욕을 앞세운 입장을 견지해 온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망언을 일삼는 일부 인사들의 비뚤어진 모습을 보게 된다. 이들의 주장은 놀랍게도 일본 우익의 주장과 그 괘를 같이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는 그들의 주장이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입지를 넓히려는 사리사욕에서 온 게 아닌지 두 눈 부릅뜨고 살펴봐야 한다.
또한 이번 기회를 통해 한일관계의 전면적인 재설정도 필요하다는 것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우방이라는 이유만으로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있었던 미국의 조치를 기대하는 태도도 버려야 할 것이다. 일본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되 우리 스스로 풀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현재 국제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철저한 실리외교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
기사최종편집일:2024-05-07 11:28:5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