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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이후 주요국의 통화정책 경험과 유동성 함정 하에서 통화정책의 유효성에 대한 연구들은 경기부양에 대한 중앙은행의 의지와 그 지속성을 경제주체들이 신뢰할 때에만 통화정책의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최근 한국은행의 경기 및 물가에 대한 전망, 물가안정 목표의 하향 조정 가능성 등은 두 차례의 금리 인하와 일치하지 않는 혼란된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성장-저물가 기조의 지속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은행은 통화정책의 유효성을 제고할 수 있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방안들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우리금융경영연구소의 ‘위기 이후 통화정책의 성격 변화와 중앙은행의 과제’ 보고서 내용을 요약한다.
현행 물가안정 목표의 하향 조정 가능성 제기
최근 우리 경제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대의 낮은 수준을 지속하면서 저물가의 원인과 전망에 대한 논란이 전개되고 있다.
한국은행은 최근의 저물가 현상이 수요측 물가상승압력의 약화에도 기인하지만, 주요하게는 농축산물의 가격안정이라는 비교적 일시적인 요인, 그리고 국제원자재가격의 하락이라는 해외 요인에 주로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국내 소비자물가에 대한 해외요인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이것이 구조적인 변화일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기존의 물가안정 목표를 하향 조정할 필요성도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한은의 물가안정목표 범위는 2013~2015년에 걸쳐 2.5~3.5%로 설정되어 있는데, 2012년부터 본격화된 저물가 기조로 인해 2년 이상 1%대에 머무르고 있어 2015년에 다소 상승하더라도 목표 범위의 달성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한은이 물가안정목표 범위를 잘못 설정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연초 한은총재는 물가안정목표 범위의 수정 필요성을 부인하다가 지난 10월초의 국정감사에서 목표치의 하향 수정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으며, 또한 10월 통화정책방향 발표문에서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물가안정목표 범위 내에서” 유지하겠다는 기존의 표현도 삭제되었다.
단순히 국내 요인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닌 구조적인 저물가 가능성으로 인해 물가안정목표 범위의 하향 조정 필요성을 제기되고 있는 사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실제로 하향 조정될 경우 우려되는 부작용도 적지 않다. 최근 저물가와 더불어 내수부진이 장기화되면서 디플레이션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끊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물가목표의 하향 수정은 이러한 기조를 더욱 강화할 수 있다.
현재 소비자들의 기대 인플레이션은 2% 후반대로 아직 안정적이지만, 기본적으로 소비자물가의 움직임에 후행하는 우리나라 기대인플레이션의 특성을 감안할 때, 향후 저물가 기조 하에서 물가안정 목표 범위가 하향 조정될 경우 기대인플레이션도 점차 낮아질 것이다. 이러한 기대 인플레이션의 하락은 물가하락에 대한 기대심리로 인해 소비를 지연시키는 디플레이션의 부작용이 나타날 가능성을 점차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평상시의 과도하게 낮은 물가는 경기침체 시기에 통화정책 당국의 대응수단을 제약한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된다. 아직 우리 경제가 직면한 상황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저물가에 수반되는 저금리에 따르는 정책대응의 어려움은 위기 이후 경기침체에 직면한 다수의 나라들에서 확인된 바 있다. 주요 선진국들은 2% 내외의 인플레이션 타겟을 유지하여 왔는데, 위기 이후 정책금리를 수차례 인하한 이후 명목금리의 제로 하한(zero lower bound: ZLB)에 직면하면서 추가적인 경기부양 수단이 제약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위기 이후 주요국의 중앙은행이 시행한 양적완화 등의 비전통적 통화정책은 단기금리가 이미 제로에 근접한 상황에서 명목금리가 제로 이하로 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들이다. 이러한 위기의 경험을 배경으로 위기 이전에 보다 높은 인플레이션 타겟을 유지하였다면 위기에 직면하여 통화정책의 운신의 폭이 더욱 넓게 확보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만약 위기 이전에 2%가 아니라 더욱 높은 4% 정도의 인플레이션 타겟을 유지하였더라면, 명목금리도 보다 높은 수준에서 유지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위기에 직면하여 금리인하를 통해 대응할 여지가 더 확보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물가안정 목표를 너무 낮게 설정하는 것의 위험성은 단지 위기의 발생 이후 명목금리의 제로 하한으로 인해 정책금리의 인하 여지가 제한된다는 점에만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 타겟을 상향 조정할 경우 중앙은행의 물가안정 의지에 대한 의구심이 높아질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도 높아질 수 있다는 점은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 왔다.
그런데 이러한 위험성은 인플레이션 타겟이 하향 조정될 경우에도 그 방향은 정반대이지만 마찬가지로 작용할 수 있다. 인플레이션 타겟이 기존보다 낮아지면 경제주체들은 저물가 상황에 더욱 친숙해질 것이며, 따라서 기대 인플레이션도 낮아지게 되고, 경기부진 하에서 이러한 기대심리의 변화는 디플레이션 위험을 높이는 방향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경우에도 버블 붕괴 직후인 1991년에 디플레이션이 나타난 것은 아니었으며, 1% 대의 저물가 기조가 지속되다가 1999년에 이르러서야 디플레이션에 빠졌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의 상황에서 물가안정 목표의 하향 조정이 야기할 수 있는 또다른 위험은 그것이 경제주체들에게 그릇된 신호를 전달하고, 금리 인하를 비롯한 통화정책의 효과를 제약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장기불황 경험과 이에 대한 정책 대응을 다룬 다수의 연구들은 통화정책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비록 일본과는 상황이 다르지만 현재 우리 경제의 입장에서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명목금리가 제로에 도달한 유동성 함정 하에서 확장적 통화정책은 무력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중앙은행이 본원통화를 추가로 공급하더라도 경제주체들은 늘어난 화폐를 추가로 보유할 뿐 소비나 투자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의 레짐 변화를 적극적으로 전달하고 이것이 경제주체들의 인플레이션 기대를 변화시킬 수 있다면 유동성 함정 하에서도 확장적 통화정책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유동성 함정 하에서 통화정책이 무력한 이유는 역설적이지만 중앙은행의 물가안정 의지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즉 중앙은행의 확장적 통화정책이 일시적인 경기개선으로 이어지더라도, 이후 물가상승과 더불어 중앙은행은 다시 긴축으로 돌아설 것이라는 경제주체들의 기대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중앙은행이 경기회복 이후에도 (물가상승에도 불구하고) 확장적 통화정책을 지속할 것으로 경제 주체들이 믿도록 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면, 즉 중앙은행이 더 이상 물가안정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믿을만한 신호를 전달할 수 있다면, 확장적 통화정책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중앙은행이 무책임하게 행동할 것이라고 신뢰성있게 약속해야”(credibly promise to be irresponsible) 한다는 크루그먼의 유명한 표현은 바로 이를 지칭한다. 이를 위한 수단으로 제시되는 것들은 예를 들면 4%의 인플레이션 타겟 설정, 명목GDP 타게팅 등이다. 이러한 정책목표는 확장적 통화정책의 지속성과 예측가능성에 대한 경제주체들의 신뢰를 얻기 위한 것이며, 위기 이후 중앙은행의 정책의지를 경제주체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포워드 가이던스’(forward guidance)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그러면 이러한 논의들이 우리 경제에서 물가안정 목표 또는 통화정책의 유효성과 관련하여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물론 현재 우리 경제의 금리가 제로 수준은 아니며 유동성 함정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지만, 통화승수가 지속적으로 낮아지고6) 최근의 금리인하 효과가 뚜렷하지 않은 등 확장적 통화정책의 효과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통화정책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중앙은행의 올바른 정책의지가 경제주체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어야 하는데, 최근 한국은행의 움직임은 두 차례의 금리 인하를 통한 경기부양 의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듯하다.
비록 8월과 10월의 두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인하하기는 하였지만, 한국은행의 경제전망은 여전히 경기회복 기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또한 저물가의 원인에 대해서도 공급측 요인을 강조함으로써 수요측 물가압력은 그다지 약하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기준금리 인하의 지속성에 대한 의구심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시장금리 하락에 미치는 영향도 제한적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중앙은행이 정책금리를 인하하더라도 확장 기조는 이것으로 종료되며 조만간 긴축으로 전환할 것이라고 시장에서 인식하게 되면, 시장금리는 곧바로 상승세로 돌아서는 경향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게다가 이 글의 모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물가안정 목표의 하향조정 움직임은 확장적 통화정책의 지속성에 대한 의구심을 가중시키는 요인이다. 현재 경기가 완만하게나마 회복세를 유지하고 있으며, 비록 물가상승률이 낮지만 공급측 요인과 해외측 요인으로 인해 발생한 구조적 현상이어서 향후 물가안정 목표 자체를 하향 조정하겠다는 것이 중앙은행의 입장이라면, 이는 통화정책이 긴축 기조로 전환할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중앙은행이 보내는 일련의 신호들이 통화정책의 긴축으로의 전환 가능성을 높이고 있는 상황이라면, 정책금리 인하의 효과는 제약될 수밖에 없다. 비록 최근에 정책금리가 인하되었다고 하더라도, 조만간 다시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면 금리 인하가 총수요 증대를 자극하는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유동성 함정에 대한 통화정책적 대응을 다룬 연구들이 강조하는 것은 달리 말하자면 통화정책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이다. 중앙은행이 기존의 예상을 뛰어넘는 인플레 목표치를 설정하거나 명목 GDP 자체를 타겟으로 설정함으로써 확장적 정책기조가 지속될 것이라는 신호를 전달해야만 경제주체들의 기대와 행동이 바뀔 수 있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물가안정 목표의 하향 조정 가능성을 비롯한 한국은행의 일련의 움직임은 두 차례의 기준금리 인하 의도를 되묻게 만들고, 확장적 정책기조의 지속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혼란스러운 신호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물론 금리 인하를 비롯한 통화정책의 효과가 뚜렷하지 않은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한국은행이 설명하는 바와 같이 수출대기업의 해외생산 비중이 높아지는 등 구조적인 변화는 금리 하락이 소비와 투자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약하게 만들고 있으며, 향후 경기 전망의 높은 불확실성도 또다른 요인일 것이다. 그러나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에서 금리 인하의 의도와 향후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중앙은행이 신뢰성있는 신호를 전달할 수 있다면, 전망의 불확실성은 다소나마 완화되는 셈이며 바로 그만큼 통화정책의 유효성도 높아질 것이다. |
기사최종편집일:2024-05-17 09:02:00
